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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미륵의 세상과 화엄의 바다 펼쳐낸 어머니의 땅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20-07-21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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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14 - 김제 모악산길 금산사와 귀신사
▲ 김제 금산사.백제 법왕 때 창건된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대 진표 율사가 주석하며 미륵도량으로 발돋움한다. 사적 제496호.
전북 전주시와 김제시를 허리에 끼고 김제·만경의 너른 들(김만평야)을 굽어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은 높이가 793.5미터에 불과한 그리 크지 않은 산입니다. 여느 명산처럼 웅장한 모습이나 기암괴석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이 산은 고된 삶 속에서도 평화롭고 평등한 미륵의 세상을 꿈꾸며 살아간 이 땅의 민초들을 품은 넉넉한 산입니다.
 
민초들 품은 넉넉한 어머니 같은 산 ‘모악산’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때로는 남의 불행을 발판 삼아 딛고 올라서야 하고, 때로는 내가 상대의 재물이 되어야 합니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가늠하기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방을 분간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욕망의 그물에 사로잡힌 삶은 늘 고통과 두려움의 연속이기 마련입니다.
두려움과 고통이 없는 평화롭고 평등한 미륵의 세상은 어쩌면 어머니 품안에 안긴 어린 아이가 마주하는 세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머니 산〔母岳〕’이라는 이름에는 모든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식을 지켜내는 어머니의 깊고 너른 품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 받고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품이 되어주길 바라는 민초들의 바람이 담긴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기를 안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은 큰 바위가 산꼭대기에 있어 ‘엄뫼(어머니산)’라 불렸다는 이야기를 마냥 흘려들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참회·점찰법으로 민중 교화한 진표 율사
신라 경덕왕 때의 일입니다. 모악산 자락 만경현(지금의 김제시)에는 활을 잘 다루는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이 소년이 열한 살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사냥에 나선 소년은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개구리 수십 마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속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사냥에 정신이 팔린 소년은 개구리를 잊었고, 이듬해 다시 사냥에 나서서야 그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이 버들가지에 꿰어둔 개구리가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충격을 받은 소년은 잘못을 뉘우치고 발심합니다. 금산사 숭제 스님에게 출가한 소년은 보안현(지금의 전북 부안)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피나는 참회 고행 끝에 지장보살에게서 계법(戒法)을, 미륵보살에게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상징하는 두 개의 나무 간자(簡子)와 수기를 받습니다. 이 소년이 망신참(亡身懺)과 점찰법(占察法)이라는 수행법으로 독특한 미륵신앙을 확립시킨 진표(眞表, ?~?) 율사 입니다.
▲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3년 다시 지었다. 법당 내부에는 본존의 높이가 12미터 가량 되는 미륵삼존이 모셔져 있다. 국보 제62호.
금산사로 돌아온 율사는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중창불사를 시작합니다. 진표 율사는 미륵장육존상을 조성해 주존으로 모시고, 금당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모악산과 금산사가 미륵불의 용화세상을 기원하는 민초들의 도량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표 율사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버들가지에 꿰인 개구리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지은 업보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에 허덕이는 우리네 중생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율사는 부사의방에서 자신이 지은 악업을 철저히 참회하는 수행으로 지장, 미륵 두 보살의 수기를 받습니다. 진표 율사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점찰법회로 중생 교화에 나섭니다.
점찰법회는 지장보살이 고통 받는 말세중생을 구제하려고 설했다는 《점찰경(占察經)》에 따라 ‘목륜상(木輪相)’이라는 나무 막대기를 던져 선업과 악업을 점친 후 악업을 철저히 참회하여 없애고 선행을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는 법회라고 합니다. 진표 율사는 점찰법회에 참여한 대중 스스로가 선행을 실천하는 주체로서 악업을 버리고 자신과 다른 이의 안락을 위해 선업을 짓도록 가르치고 용화세계, 즉 미륵의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진표 율사가 일구려 한 미륵의 세상은 이곳 금산사에서 1200여 년의 세월을 이어가며 새 세상을 향한 꿈으로 영글어 갔습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정여립(1546~1589)이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라며 대동계를 조직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꾼 곳,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녹두장군 정봉준(鄭鳳俊, ?~?)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인 세상을 꿈꾼 곳, 스스로 금산사 미륵이라 칭하며 후천개벽의 세상을 역설한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증산교를 창시한 곳이 바로 이곳 금산사 주변입니다.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 1038~1096) 스님은 금산사의 면모를 일신시켜 전각·당우 80여 동, 산내 암자 40여 곳에 이루는 대가람을 일구었다. 보물 제24호.
금산사,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
《금산사지(金山寺誌)》에 따르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法王) 원년(599)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창건되었습니다. 진표 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송고승전》 <백제국금산사진표전>)과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창건했다는 설(《신증동국여지승람》), 가섭불(迦葉佛)시대의 옛 절터를 재건했다는 설(<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도 있지만, 대체로 진표 율사가 출가하기 이전인 경덕왕 대에 이미 금산사가 경영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진표 율사가 금강산 발연사에서 입적한 이후 금산사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견훤이 금산사를 원찰로 삼으면서입니다. 견훤은 금산사를 보호하려고 주변에 성곽을 쌓았는데, 이 때 쌓은 성문이 지금도 금산사 진입로 변에 남아있습니다.
혜덕왕사 중창…당우 80여 동·산내암자 40여 곳
고려시대에 이르면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 1038~1096) 스님이 금산사의 면모를 일신합니다. 혜덕 왕사는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 984~1070) 스님으로부터 유식학을 배운 유가업(瑜伽業, 법상종)의 큰스님입니다. 스님은 고려 문종 33년(1079)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 퇴락한 가람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는 등 중창에 힘씁니다. 스님은 원래 절을 사찰 전체를 관장하는 대사구(大寺區)로 삼고, 대사구 남쪽에 간경(刊經)과 법석(法席)을 주관하는 광교원구(廣敎院區)를, 동북쪽에 원로들이 주석하는 봉천원구(奉天院區)을 설치했습니다. 스님의 중창으로 금산사는 대사구 62동, 봉천원 13동, 광교원 11동 등 80여 동의 당우와 40여 곳의 산내암자를 둔 대찰이 되었다 합니다.
금산사는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 사명대사 유정(泗溟堂 惟政, 1544~1610) 스님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3대 승병장으로 꼽히는 뇌묵 처영(雷默 處英, ?~?) 스님이 출가하고 머문 사찰입니다. 스님은 서산대사가 팔도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자 1000여 명을 모아 승병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금산사는 왜란 기간 중 왜적의 보복을 받아 경내 당우와 산내 암자 40여 곳이 모두 불탔다고 합니다. 금산사는 선조 34년(1601) 수문(守文) 스님 등이 시작해 34년간 진행된 불사로 법등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 귀신사 대적광전 뒤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 귀신사는 의상 스님이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해 창건한 화엄십찰 중 한 곳이다.
▲ 귀신사 전경.
의상 화업십찰 중 한 곳 화엄도량 ‘귀신사’
김제 모악산 마실길 2코스는 금산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귀신사와 금평저수지를 거쳐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길입니다. 이 길은 전라북도가 선정한 전북천리길 중 금산사길이기도 합니다. 금산사주차장에서 산길을 따라5km쯤 가면 귀신사(歸信寺)에 다다릅니다.
귀신사는 문무왕 16년(676)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라 합니다.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였습니다.
의상 스님은 당나라 지상사에 주석하던 지엄(智嚴) 스님 문하에서 수학한 후 귀국해 화엄학을 널리 소개하고 알린 분입니다. 이 때문에 스님을 ‘해동화엄의 초조’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스님 이전에도 화엄은 우리나라에 전래됐습니다. 자장 스님은 《화엄경》을 강설했고, 원효 스님도 《화엄경종요》와 《화엄경소》 같은 저술을 10여 권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의상 스님을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로 삼는 것은 스님에 의해 화엄교학이 체계화되고 교맥(敎脈)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곳 귀신사는 화엄사상을 널리 전하기 위해 의상 스님이 창건했다는 사찰 10곳, 즉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한 곳입니다. 화엄십찰은 《삼국유사》 <의상전교(義相傳敎)> 조와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소개돼 있는데, 두 기록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팔공산 미리사, 지리산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및 보광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무산〔母山〕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원주 비마라사 등이 그곳입니다.
화엄십찰 중 일부 사찰의 창건 시기가 후대인 걸 보면 의상 스님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열 곳의 사찰을 모두 창건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의상 스님의 문도가 주석하며 화엄사상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사찰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최치원의 기록대로라면 창건 당시 국신사로 불린 귀신사는 의상 스님 또는 그의 제자들이 주석하며 화엄사상을 널리 알린 화엄도량이었습니다.
최치원은 이곳 귀신사에 머물면서 <법장화상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같이 알려진 근거는 《한국불교사찰전서》인데, 이 책을 지은 권상로 박사는 그 전거를 따로 밝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귀신사 삼층석탑과 석수. 삼층석탑은 귀신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감 선사, 원명 국사, 현오 국사 등 주석
귀신사는 통일신라 말 사자산문의 개조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 스님이,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 1090~1141) 스님이 각각 중창했습니다. 원명 국사는 고려 숙종의 넷째 아들로 대각 국사 의천의 제자입니다. 스님은 예종 17년(1122)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지만,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합니다. 인종의 아들인 현오국사 종린(玄悟國師 宗璘, 1127~1179) 스님도 한 때 이 사찰 주지를 역임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귀신사는 사세가 꽤 컸습니다. 절에서 4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리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도마을 일대가 모두 귀신사 경내였음을 알 수 있지요.
귀신사는 선조 34년(1601) 부분 중수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되었으나 옛 영화를 되찾진 못했습니다. 사찰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석수, 소조석가삼존상과 나한상,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이 옛 영화를 말없이 전할 뿐입니다.
석탑과 석수가 있는 절 뒤편 언덕에 오르면 대적광전 지붕 위로 청도마을의 고즈넉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귀신사를 배경으로 <숨은 꽃>이란 작품을 쓴 양귀자 작가는 이 절을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神)이 쉬러 돌아오는〔歸〕 자리’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서서 청도마을 너머 모악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두 절은 ‘돌아올 것을 믿는(믿음으로 돌아가는)’ 곳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에 지친 민초들이 돌아와 미륵 세상을 꿈꾸며 의지하는 절, 의상과 그의 법손들이 돌아와 세상을 향해 다시 화엄의 바다를 펼쳐 보일 절이라는 믿음 말이지요.
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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